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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니안 나무는 죽음을 전하는 나무로, 바나나 나무는 생명을 불어넣는 나무로 불립니다. 니안 나무는 자라면 자랄수록 주위의 모든 나무를 죽이는 반면, 바나나 나무는 자라는 동안 주위에 새싹을 만들어내어 사람과 자연생태에 자신의 열매와 잎사귀로 큰 유익을 주기 때문니다. 믿음의 사람은 바나나 나무처럼 잘 될수록 다른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전하는 사람이 어야 합니다. 나 하나 잘 되기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바니안 나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 편하자고 남을 불편하게 해서도 안 됩니다. 성도들은 마땅히 살리는 영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소망을 주고 생명을 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정신으로 산다는 것은 희생과 섬김으로 남을 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청년을 살리신 사건이 나옵니다. 어떤 일로 이 청년이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과부의 독자였습니다. 당시 과부는 긍휼의 대상이며 구제의 대상이었습니다. 과부는 어떤 기업도 이어받을 수 없으며 지금처럼 경제활동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과부에게 살아갈 유일한 소망은 아들이었습니다. 저는 이 시대의 청년을 생각해봅니다. 이 시대의 소망인 청년, 그러나 마지막 소망의 불이 꺼져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다음 세대의 위기 속에 한국교회의 미래는 암담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살아나는데 안타깝게도 이 시대에 청년들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영적인 인공호흡이라도 해서 청년들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성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마침 성문 밖으로 시신을 매고 나오는 상여 행렬과 만납니다. 죽은 청년을 매고 가는 죽음의 행렬이 생명 되시는 예수님의 행렬과 만난 것입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죽음의 문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해결됩니다. 절망도 예수님을 만나면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시요 생명이시기에 죽었던 청년이 살아났습니다. 결국 죽음의 행렬은 생명의 주님을 만나 생명의 행렬로 바뀌었습니다. 곡하던 소리가 찬양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눈물의 행렬이 기뻐 춤추는 행렬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와 사망을 십자가와 부활로 이기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생명의 행렬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독자를 살리실 때 먼저 과부를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눈물에 약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담은 관에 손을 대신 것도 거룩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거룩하게 되었고 생명의 행렬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느 행렬에 속해 있습니까? 죽음의 행렬 속에 슬픔과 절망에 빠진 행렬입니까? 니면 예수님을 만나 올라가는 생명의 행렬에 속해 있습니까? 우리 모두 생명의 행렬 속에 기쁨이 넘쳐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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