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성령에 대해 크게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먼저 성령님을 ‘내가 부리는 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으로 찬양과 경배를 받으실 분이지 내가 함부로 부릴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또 하나의 큰 오해는 성령의 은사를 자신의 영광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은사는 내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교회의 유익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주셨습니다. 또 다른 오해는 성령의 능력을 현상적인 측면으로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은 성령의 열매로 증명되고 성도의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현상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방언이나 병 고치는 은사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성숙한 삶과 교회의 덕에 유익을 주는 은사에 더욱 집중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의 내용입니다. 사도들과 주의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얻기 위해 다 같이 한곳에 모여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당시 바리새인이나 대제사장들과 같은 종교권력자들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경건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이는 앞으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누구를 통해 확장되어 갈 것인지를 보여주시는 내용입니다. 성령강림은 특정한 종교권력자들이 독점하는 능력이 아니라 평범한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쓰임 받을 것을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특별히 놀랄만한 일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각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방언’과 성령의 은사로 언급되는 ‘방언’은 동일한 개념이 아닙니다. 그래서 개역한글 성경에서 ‘방언’이라고 번역되었던 것을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다른 언어들’로 번역했습니다. 만약 이 부분을 오해하면 성령 받으면 방언을 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강림 사건에서의 ‘방언’의 개념은 ‘다른 언어들’의 개념으로 각기 다른 지역에 살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던 자들이 성령의 임하심으로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었고 언어의 장벽을 넘어 소통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강림 사건은 단순히 외국어가 자연스럽게 들려졌다는 개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성령님을 통해 온 천하 만민을 복음으로 하나 되게 하시겠다는 ‘싸인’과도 같은 사건입니다.
창세기 11장에 바벨탑 사건은 원래 언어가 하나였지만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불순한 목적으로 큰 탑을 지으려 했을 때 하나님의 심판으로 언어를 혼잡케 한 사건인데 성령강림 사건과는 완전히 상반된 사건입니다. 죄와 불순종으로 혼잡하게 된 언어가 성령을 통해 다시 하나가 된 사건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야말로 혈통과 언어, 민족을 넘어 온 인류와 열방을 향해 퍼져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강림 사건은 단순히 현상적인 기이한 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꿈을 보여줍니다. 성령은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의 마음에 두게 하여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는 ‘선교의 영’이십니다. 내가 성령의 사람인가 아닌가는 ‘선교에 대한, 영혼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있는가에 따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주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능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이 말은 선교에 더욱 힘쓰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라기는 성령의 사람인 저와 여러분 모두가 선교의 일에 모두 동참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