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가 마르지 않는 삶
추수감사주일을 앞두고 우리의 삶에 감사가 얼마나 풍성한지 돌아보길 원합니다. 우리는 목장 모임을 통해 ‘삶 나눔’의 순서를 갖습니다. ‘삶 나눔’ 시간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있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감사 나눔’일 겁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감사할 일이 전혀 없다고 말하고 실제로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일은 잘 풀리지 않고 가족 중에 아픈 자가 있으며 준비하는 일에는 가능성이 잘 보이지 않는 분들에겐 감사 고백이 배부른 한담(閑談)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감사는 발굴되어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감사라도 발굴해 내야 합니다. 뇌성마비로 하루하루가 힘겨운 인생을 살던 송명희 시인은 힘겹고 답답한 인생에도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 ‘공평하신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이것은 드러나지 않은 감사까지 캐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남들이 당연하게 가진 것조차 없어도 자신은 예수 보배를 가진 자임을 고백하며 감사합니다. 남이 가진 지식과 건강이 없어도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영적인 건강주심에 감사하며 노래합니다.
감사는 환경이 아닌 마음과 자세로 고백 될 수 있습니다. 사고를 당했어도 이만하길 다행이라며 감사하는 분도 있고 수술을 받았어도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체력과 소망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는 믿음의 수준과 비례합니다. 불평과 원망을 달고 다니는 사람의 영적 수준은 대단히 낮다고 보아도 큰 비약은 아닐 것입니다. 게다가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만들어 냅니다. 감사도 계속하다 보면 쉬워집니다. 감사 거리가 별로 없지만 그래도 감사를 찾다 보면 내 삶에 감사 거리가 무진장 펼쳐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감사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물론 불평에도 전염성이 있습니다. 입술의 능력은 파급효과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감사는 마르지 않는 샘과 같습니다. 감사를 파고 또 파도 계속 감사의 샘물이 솟구쳐 오릅니다. 어떤 분은 목장 모임을 통해 감사를 돌아보고 고백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감사의 고백이 삶을 부드럽게 하고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도록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함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않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먹을 것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을지라도’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고 말씀합니다. 현재의 ‘없음’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심’에 주목해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감사가 점점 사라져가는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받은 은혜보다, 없는 것에 주목하여 불평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늘 문을 여시고 만나를 내리신 것처럼 우리를 향해서도 은혜의 단비와 필요한 만나를 내려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 은혜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그저 당연하게 생각함으로 감사하지 않을 뿐입니다. 물 근원(根源)을 찾아야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듯 우리도 감사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어야 계속 감사가 솟구쳐 메마른 인생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추수감사주일, 그 은혜를 세상과 함께 나누고 베푸신 주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