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은 ‘예배 드리는 것’에는 관심이 많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내가 예배를 드렸다는 것’에 만족할 뿐, ‘내가 드린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셨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받으신 예배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내가 감동받았거나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예배를 드렸다고 해서 그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신 예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배의 초점을 ‘나’에게 맞출 것이 아니라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 맞춰야 합니다.
최근 코로나 19사태가 장기화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가나안(안나가) 성도’가 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가정에서라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렸는가’ 입니다. 자칫 예배를 시청하고 설교를 들었던 것이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예배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내가 드렸어’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예배를 기뻐 받으셨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가인과 아벨도 모두 제물을 가지고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만 받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겉치레로 예배드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성전의 마당만 밟는 자들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자신을 드리지 않고 제물만 가져왔다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 힘입어 지성소로 나아가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희생이 있는 예배이어야 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드리라’는 의미는 제사장이 제물을 잡아 하나님께 드리는 개념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드려야 하는 예배는 ‘자신을 죽이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죽어야 사는 원리가 예배를 통해 나타납니다. 자신의 완고한 고집과 자아, 불순종의 삶이 예배로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역사’가 예배를 통해 일어나야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는 역사가 예배를 통해 동시에 나타나야 합니다. 희생없는 예배는 바른 예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위에 우리의 예배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전인격적인 삶의 예배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예배’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께 드리라’에서 ‘몸’은 영혼과 육신을 모두 포함한 개념입니다. 전 인격적인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몸만 나와 있는 예배가 아니라 전인격적인 삶을 드리고 주님을 만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때 예배자는 전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주일예배 잘 드렸으면 주중의 삶에도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배에 한 시간 투자했으니 나에게 복주실 것을 기대하며 출석하는 것은 예배의 본질이 아닙니다. 예배를 통해 전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서 내 삶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예배는 인간의 관점에서가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희생’이 전제되어야 하며 전인격적 드림과 전인격적 변화가 예배를 통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질문] 1. 코로나 19 상황에서의 나의 예배를 점검해봅시다.
2. 앞으로 우리의 예배생활이 어떠해야 할지 함께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