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전성기가 날마다 계속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아쉽게도 어제의 신앙보다 못한 오늘의 신앙인 경우가 많습니다. 창세기 16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상태가 그렇습니다. 창세기 14장은 아브라함의 놀라운 승리를 보여줍니다. 15장에서는 하나님의 약속과 이브라함의 믿음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16장에 와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함과 적당히 타협하는 장면입니다.
아브람(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사라)는 애굽 여종 하갈을 통해서라도 아브라함에게 후사를 이으려 했습니다. 물론 이 모습은 ‘사라의 조급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살펴보면 사라의 행동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사라는 아브라함과 달리 하나님의 약속을 간접적으로 들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약속도 ‘아브라함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 하셨지, ‘사라의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고 듣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몸 역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였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하갈을 통해 아브라함의 후사를 잇게 하려는 방법까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사라의 제안을 거절해야 했고 사라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도록 격려했어야 옳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라의 제안을 냉큼 수용합니다. 그리고 하갈은 아브라함의 후사를 임신합니다. 하갈의 임신 소식은 사라에겐 기쁨이라기보다 자신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신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갈이 임신한 후에 주인인 사라를 멸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문제를 알아서 처리하게 합니다. 결국 사라의 학대를 견디지 못한 하갈은 임신한 몸으로 도망갑니다. 모른 척한 아브라함과 달리 하나님은 도망간 하갈을 찾아오시고 위로하시며 여주인에게로 돌아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훗날 낳게 될 자식의 이름도 ‘이스마엘’로 짓게 하십니다. 이스마엘은 비록 약속의 자녀는 아니지만 그 역시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하나님은 그를 지키십니다. 다만 이스마엘의 후손은 훗날 아랍인들로 이스라엘과 두고두고 적대 관계를 갖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조급함과 타협의 대가는 너무 컸습니다.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진행하다 엄청난 대가를 치렀습니다.
우리는 타협하기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기까지 수많은 기다림이 필요했습니다. 이 기다림이 힘들어 수많은 거짓 메시아도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코로나 19 속에 사는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막막함과 불확실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신앙의 적절한 타협안을 우리에게 제시할 겁니다. 그러나 힘겨운 오늘을 살아낼지라도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믿음의 눈을 들어 주님의 약속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질문] 1. 내 생각대로 조급하게 일을 처리했다가 어려움 당한 경험이 있다면 말해봅시다.
2. 마귀가 내미는 신앙의 타협안을 우리가 어떻게 다루어 처리해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