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전래동화 중에 창조주와 새들의 대화가 나온다고 합니다. 새들은 창조주에게 따져 묻습니다. ‘왜 자신의 다리는 이렇게 가늘고 어깨에는 왜 이렇게 무거운 짐을 주셨는지’를 불평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새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들이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는 그 양쪽 어깨의 짐을 활짝 펴 흔들어 보아라!” 새들은 거추장스러운 어깨짐을 활짝 펴서 흔들어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새들의 몸은 창공을 향해 날아올랐습니다. 그제야 새들은 알았습니다. 자신의 양어깨에 붙어있는 것은 짐이 아니라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게 하는 날개라는 것을요. 모든 인생 역시 인생의 짐을 짊어지고 삽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짐을 날개로 여기며 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주신 날개를 짐짝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과거엔 ‘복’을 이야기할 때 많이 사용되었던 구절이었지만 사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말씀입니다. 나면서부터 제한되고 비참한 야베스 같은 인생의 기도에도 하나님은 들으시고 허락하시면 놀랍게 회복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다 자손을 언급하다가 갑자기 ‘야베스’를 등장시킵니다. 이것은 야베스와 같은 존재라도 하나님이 도우시고 역사하시면 귀중한 자가 되고 온전한 구원과 회복을 경험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야베스의 기도는 대박을 꿈꾸며 실현하는 기도가 아니라 비참하고 무거운 짐진 인생이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더하시고 회복시키심을 말씀하십니다.
야베스의 이름은 ‘고통의 사람’, ‘수고로운 자’라는 의미입니다. 야베스의 어머니가 야베스를 낳으면서 ‘난산’을 했기에, 그가 태어난 후에도 ‘고통을 주는 아이’로 ‘야베스’라 불렸습니다. 날 때부터 고통을 주는 인생으로 불렸다는 것에서 야베스는 태생적 상처를 지닌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통에 머물지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고 결국 환난에서 벗어납니다. 여기에서 ‘야베스’는 바벨론에 잡혀 소망을 잃어버린 ‘유다 백성’과 같습니다. 그들은 태어나보니 이방 땅에 살게 되고 포로로 잡혀온 민족이라는 태생적 아픔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벨론에 포로된 고통 가운데 있는 ‘야베스’와 같은 유다 백성을 살리셨습니다.
야베스를 묵상하면서 ‘고통 중에 임하신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예수님도 태어나실 때부터 태생적인 아픔을 지니셨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베들레헴 지경에 두 살 아래 아기들이 다 죽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탄생도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와 같아서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이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초라하게 보이고 탄생 자체가 고통을 안겨주는 것과 같은 예수님을 통해 구원은 이뤄졌습니다. 예수님은 태생적 아픔을 지니셨으나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셨습니다.
우리들도 야베스와 같은 힘든 고통이 우리의 어깨를 짐처럼 짓누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것 때문에 더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 짐처럼 여겨졌던 야베스의 고통이 오히려 날개가 되어 펼쳐질 것입니다. 나를 짓누르는 짐으로서 ‘야베스’가 아니라 하나님께 응답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야베스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짐이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날아오르는 날개가 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