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만나야 하겠기에 (눅 5:17-26)
수많은 만남이 중요하겠지만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과의 만남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이 만남이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을 준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마땅히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사역을 중매하는 일로 표현했습니다(고후 11:2).
오늘 본문은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어 예수님 계신 곳에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전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한센병 환자)를 고쳐주시는 장면도 나옵니다. 이 두 사건에 나오는 병자들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무지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당시 나병환자는 부정한 자로 여겨졌기에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절대 나와서는 안 되는 자들이었습니다. 나병환자가 일반인들과 대면한다는 것은 율법적 조약을 어기는 부정한 행동이었습니다. 중풍병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에 마비가 있는 자이기에 자신의 힘으로는 일어서서 걸을 수도 없는 자였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과 능력으로는 도무지 예수님께 나아올 수도 없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야 했기에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도 이 사람을 고치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님을 만나야 하겠기에 지붕을 뜯고 환자를 내리는 무모한 시도를 했습니다. 사실 그들의 행동은 대단히 무례했습니다. 집 주인에게 허락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지붕을 뚫을 것이니 흙 먼지가 떨어질 것이라며 조심하라고 양해를 구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일방적이고 무례하고 무모한 행동을 꾸짖거나 책망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들에게 죄사함을 선언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그들의 간절함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하겠기에 간절하고 갈급한 마음으로 무모해 보이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분명 고치시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포기하지 않는 간절함으로 예수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복음을 위해 얼마나 무모합니까? 물론 이 말은 복음을 위해서라면 무례한 방법이라도 사용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점잖게 양반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다급하고도 중대한 일 앞에서 혹시 우리는 간절함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닙니까? 생명을 살리는 일에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간절함이 있어야 다급함도 함께 나타납니다. 그래야 전도해야 할 대상자도 보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선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물질이나 건강에는 간절한데 반해 영혼 구원에는 별다른 간절함이 없어 보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간절함을 상실한 ‘구경꾼’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나 하나의 신앙에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쩌든지 그들도 예수님을 만나야 하겠기에 생명 살리는 일에 더 애쓰고 수고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
(나눔) 1. 나에게 ‘예수님을 꼭 만나도록 인도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2. VIP 초청일에 그들을 초대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나눠봅시다.